<회상과 잔상-Recall and Afterimage>
2022.10.25 ~ 2022.11.23
차종례 개인전


“내가 찾고 있는 가벼움의 이미지들이 현재와 미래의 현실로 인해 흩어져버리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김병수 미술평론가


조각가 차종례의 작업실을 방문해 전시작과 이전 작업들을 보며 얘기를 나눴다. 바로 그 대화에서 이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이탈로 칼비노가 하버드 대학교 <노턴 시학 강의>를 위해 쓴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시학은 우리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시만이 아니라 예술의 근간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작가와의 대화 그리고 작품들을 보면서 왜 이 문장을 회상했을까? 작가가 아무리 자연을 말해도 그냥 자연으로 보아주지 않더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던 것같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가의 작업이 ‘보자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방색? 지금까지 작업해온 모든 것이 보인다는 나의 지적에 대하여 그냥 보자기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경우나 작업은 이중적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기도 하지만 상관없이 이야기가 흐르기도 한다. 어떤 사물을 그 자체로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주체로서 내가 아는 것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을까?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사물을 사서 소유했다고 확신할 때이다. 신앙이 경제와 접속하는 순간인데 여기에 이상한 상태가 개입한다. 자연과 인공 그리고 (예술) 작품이라는 사건 혹은 현장이다. 자본주의에서 관념이 아닌 “것”이 작동한다. 예술이 항상 묻는 것은 아니지만 차종례가 느닷없이 그리고 팬시하게 자연을 빙자해 묻는다.


모든 객체의 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존재론이나 집합론을 심각하게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차종례 스스로가 “자연” 혹은 “자연적인 것”이라는 낱말을 자신의 작업과 연관지을 때 약간은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수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상징과 문화 그리고 역사로 이어진다. 나눌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융복합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작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직관’은 이미 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어떻게 보여주고 만지게 할까? 조각은 그럴 수 있는가?


예전에는 원목과 원뿔이라는 것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레이어와 물결을 보여준다. 이런 설명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작가의 작업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말했는지 이해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변형 이전의 날 것을 제시한다는 것인지 그러다가 이제는 어떤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인지 그 의도를 단정하기 어렵다. 작가가 ‘그 안에서’ 소스를 뽑아낸다고 했을 때 거기는 어디일까? 그리고 추출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퓌지스로서 자연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면 사물 자체에서 감각이 작동하는 바를 조각가는 만들어낸다는 것일까? 물질과 형상에 대한 융합적 반응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작용이 스며든다. 어쩌면 시간 혹은 역사에 대한 고려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작업들이 보여주는 심플하면서도 변화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다.


이것은 음과 양의 쌍이 지속적인 짝을 이루어나가는 작업들 덕분인데 조화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로 여긴다는 태도이다. 반대들의 적당한 절충이라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연에 대한 관조에 가깝다. 그래서 이 바라봄은 소극적이거나 정적인 것인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동적인 것, 동세를 드러내는데 이렇게 에너지가 퍼져 나간다. 이 부분은 테크놀로지와 연관해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소멸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기술과 자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현대 사회이다. 이 속에서 예술 그것도 조각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점점 더 제한적으로 회고적이거나 소극적이게 된다. 대응으로서 근원적인 것을 상징 속에서 찾아내고 반복하는 것은 지극히 전략적이다. 파동과 등고선 같은 이미지들은 이미 윤리적인 검증을 통과한 것으로 인간에게 어떤 감동을 지속적으로 선사한다. 특히 수공예적 노동의 감각은 더욱 감동적이다. 이어서 원과 오방색 같은 문화적 코드는 우리 망각 속에 기억 혹은 회복의 에너지를 부여한다.

“조각보”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상징이라기보다는 조각의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상정된 전체로서 조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출산 이후 이른바 경력 단절 조각가로서 복귀를 할 때 “구상적” 작업을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이후 “자연”을 탐구하는 지금의 모습을 갖게됐다는 것이다. 이 때 그가 생각하는 조각의 세계는 역사적인데 다시 말해서 미술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의미로 시간성에 대한 감각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작업에 대한 만족도는 좀 부족하다고 자평한다. 자연/존재 그리고 역사/시간을 조각/작품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추상한다는 것, 혹은 자연을 이해하거나 표현하기 위한 추상으로서 뾰족한 것이나 원형을 채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고대 고전의 전통과 신화적인 것 그리고 종교 등에서 강력하다. 그만큼 인간의 내면에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이다. 역동성을 갖는다는 것은 사물이 정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물과 정보는 서로 보완적이다. 정보 과잉에 대한 우려로 사물성의 확대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정보는 사물의 동일성에 대하여 비동일성의 미학을 펼쳐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에서 흐르는 에너지는 사물성과 동시에 정보성을 갖는다. ‘자연적인 것’이란 존재로서 그 이중성을 증명한다. 형식과 매체만으로 조각을 정의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나름의 작용과 목적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각가 차종례가 끊임 없이 자신의 작품을 “자연 그 자체로” 봐달라는 의미가 그것 아닐까! 물론 어떤 ‘장치’ 혹은 장식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단지 우연적이거나 부차적인 요소로 치부할 수는 없다. 띠나 자개 같은 것들 말이다.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상징성이 주역들에게 상응하는 방식은 이후의 작업들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전통적인 것과 결합하는 방식은 일종의 오브제를 삽입하는 기법이다. 미학적 전략상 애매성의 시학을 구사할 수는 있지만 그 경우 해결해야할 난점들이 많다. 상투성을 넘어서는 매력과 상징성이 갖는 진부함을 대체할 새로운 윤리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 디지털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박 혹은 반발로서 노동의 아날로그를 제시하는 것이 조각가 차종례의 미학일 수도 있다. 그때 그의 드로잉은 우리가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루트이자 그에 따르면 “지금 작업의 근거”라고 보여진다. 조금 길지만 마르틴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 첫 부분을 읽어보자. “이 강연 제목에 등장하는 샘[근원]이라는 낱말은 어떤 곳을 가르킵니다. 그곳으로부터 그곳을 통해 있는[샘솟는] 것은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것답게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무엇인가가 그것 자체로 그것답게 있으면 그 무엇인가가 본재한다[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무엇인가의 샘은 그 무엇인가의 본재[본질]가 새어 나오는 곳입니다. 예술 작품의 샘에 대한 물음은 예술 작품의 본재가 새어 나오는 곳에 대한 물음입니다.” 물론 조각가의 작품을 드로잉이 전부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거라는 것은 단순한 뒷받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능성과 함께 그 지속성을 증거한다. 조각 작품이 단순한 사물을 초월할까? 그 세계가 예술계라는 허황된 주장을 수용할 판타지는 없다. 그런데 차종례의 자연으로서 사물과 비사물의 정보가 스며드는 장소로서 드로잉을 염두에 둔다면 동시대 조각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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